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운요호 사건 (문단 편집) === 패배의 원인 === 의문스러운 것은 왜 조선은 이보다 더 규모도 크고 무장도 잘 된 [[프랑스 해군]](군함 7척을 끌고 왔다)과 [[미 해군]](3천 톤 짜리를 기함으로 끌고 왔다)을 상대로 비록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공격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는데, 왜 [[일본 해군]]의 운요호 한 척(250톤 슬루프. 참고로 '''[[판옥선]]이 200톤이다''')에게 허무하게 털렸는가이다.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694555344|#]] 간단히 말하면 [[병인양요]]와 4년 전의 [[신미양요]]의 피해를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미양요는 역사책에 흔히 "강화도의 5개 요새를 함락당했다" 정도로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피해를 입었던 사건이다. 이때 빼앗긴 대포는 당시 조선에서 최고의 대포라고 할 수 있는 [[불랑기포]]를 대략 '''500문 가량''', 총기는 무려 '''20,000정''' 가까이 나포되어 잃었다. 심지어 미군은 후퇴하면서 이것들을 물에 빠트리거나 불에 태웠기 때문에[* 왜냐면 조선의 총과 대포는 근대적 무기를 갖춘 미군에게는 그저 유물에 불과하였기에 쓸모 없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조선이 그만큼 무기 수준이 16세기 수준밖에 안될 정도로 심각하게 낙후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당연히 녹슬거나 녹아버린 대포들은 '''그대로 손망실'''해버렸다. 이 어마어마한 손실을 고작 4년만에 복구한다는 것은 유럽과 미국처럼 산업혁명으로 자동공장이 있던 것도 아닌 조선으로서는 아무리 해도 무리였다.[* 대포 자체가 무슨 틀에 넣고 대량생산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1~2년의 자연시효를 거치고 열처리와 연마가공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현대에도 대포는 단시간에 제작이 아된다.] 게다가 요새의 성벽은 무너지고 화약과 식량, 군복 등이 대포와 마찬가지로 손망실 처리됐다. 더욱이 문제는 이때 조선 조정에 돈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단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증건과 [[당백전]] 발행으로 경제를 휘청이게 했던 것도 있지만, 당시 고종 10년(1873년) 11월 대원군이 축출된 이후다 보니[* 즉, 이 사이에 고종이 친정을 하여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 척족정권이 집권했던 시기는 고작 2년, 달수로 치면 2년조차 되지 않아서 아직 이들로 당장 조선의 방어태세가 망쳐지지는 않았다.] 이전의 실책을 바로 잡는데만도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었다. 실제로 [[고종(대한제국)/생애]] 문서의 친정 목차를 보자. 인플레이션의 원흉이자 악화(惡貨) 자체인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청전(淸錢)|청전]]을 폐지해야 하는데 '''당시 조선 왕실의 창고에는 청전 밖에 없었다'''. 심지어 고종실록 11년(1874년)[* 심지어 신미양요 직후도 아니고 운요호가 들어오기 1년 전이다.] 3월 26일 기사를 보면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진무사(鎭撫使) 신헌(申櫶)의 장계(狀啓)를 보니, 본 영에서 관할하는 오른쪽 연해 각진(各鎭)에 포대를 설치하는 공사를 지금 막 시작하였으니, 비용으로 쓸 돈으로 3만 냥에 한하여 지급해 주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 주소서. 무기 등의 물품도 지급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포대의 설치를 시작하는 것은 긴급한 일로서 해당 장수가 오늘날에 이르러 옮겨다 쌓는 데는 반드시 소견이 있어서 일 것이니, 본 영에서 잘 처리할 것입니다. '''비용에 있어서는 경각사(京各司)의 저축이 바닥났으니, 실로 손쓸 길이 없습니다.''' 지난번 포세(包稅)의 원획(元劃) 중 1만 냥을 이미 실어 보냈으니, 우선 이것을 배정하여 쓰고, 나머지 비용은 사역원(司譯院)에 신칙해서 기일에 맞추어 모두 수송하도록 하며, 무기는 신의 부(府)에서 적절히 헤아려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나온다. 즉 포대 설치 공사를 해야 할 정도로 요새가 초토화된 상황이었는데, 그걸 설치하라고 줄 돈도 시간도 없었던 것이고, 이런 상황에서 운요호가 쳐들어오니 일단 맞아주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조선이 아주 방비 강화에 손을 놓았던 것도 아니다. 당시 조선의 방비는 철저하게 두 양요로 초토화된 강화도의 방비 복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운요호는 탑재한 암스트롱 포로 초치진과 포격전을 펼쳐 초지진을 제압하긴 했지만, 그 외에는 강화도에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하지 않았다. 운요호라는 자그마한 배 한 척과 그 안의 22명밖에 안되는 소수 병력으로 조선에서 집중적으로 복구에 주력한 강화도를 친다는 전면적인 군사활동은 무리였기에 전력 및 장비가 차출된 강화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투자가 이뤄지지 않은 영종도를 강습해 공격하고[[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2113883613|#]] 무력시위로 조선을 압박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국정의 난맥으로 국력을 전부 소진한 상태였고 회복되기도 전에 운요호가 와서 툭 친 것에 허무하게 참패를 당한 것이다. 또 다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운요호 사건이 벌어진 19세기 후반이 서양과 서양을 제외한 세계 사이의 군사력 격차가 엄청난 속력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점이다. 19세기 중반 발명된 [[미니에 탄]]은 소총의 [[유효 사거리]]를 5배 가량 증대시켜서,[* 참고로 미니에 탄은 탄환의 종류이며, 미니에 탄을 발사하는 총의 기본 구조 자체는 기존의 [[라이플]] 소총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1853~1856년 [[크림 전쟁]]에서 미니에 탄을 도입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강력한 러시아군을 혼쭐내준 배경이 되었으며, 미니에 탄은 1861~1865년 미국의 [[남북전쟁]]에서도 북군과 남군 모두에게 엄청난 사상자를 안기며 인간도살자의 면모를 보여준 바가 있었다. 조선군이 숫적인 우위에도 불구하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각각 프랑스군과 미군에게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던 것도 미니에 탄이 가진 압도적 사거리 우위 때문이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미니에 탄이 등장하고 1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아 연사력이 비약적으로 발전된 [[후미장전식]] 소총이 개발되면서, 기존에 사용하던 [[전장식|포구장전식]] 소총을 순식간에 구닥다리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당시 서양의 무기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조선군이 쓰던 구식 [[조총]]으로는 사거리와 연사력에서 서양의 신식 소총을 도저히 상대할 수 없었다. 한편 일본은 이미 1860년대에 메이지 유신을 이루기 위한 내전 과정에서 막부 뿐만 아니라 [[사쓰마 번]], [[조슈 번]], [[도사 번]] 등이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수천정씩의 신식 소총을 수입하여 사용했을 정도로 군대가 근대화되어 있었다.[* 참고로 원래 영국을 비롯한 서양 국가들은 소총류를 비롯한 무기를 해외에 판매하는데 열성적이었다. 서양은 타 대륙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향신료, 염료, 흑인 노예, 면직물, 차 등을 수입해야 했는데, 18세기까지 서양의 주요 생산품인 [[모직물]], 유리 가공품 등은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수요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수출품은 별로 없는 상황에서 많은 수입품을 사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 서양이 다른 지역보다 우수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던 또 다른 분야가 있었으니 바로 [[제련|금속 제련]]과 [[금속가공|금속 가공]], 특히 무기 제작 기술이었다. 그래서 서양인이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그냥 금이나 은을 들고 오거나 ~~아니면 [[마약]]을 [[아편전쟁|팔거나]]~~ 이러한 귀금속의 유출을 막기 위해 갑옷, 총, 화약류를 가져와야 했다. 예를 들어 대항해시대 때 유명한 [[삼각무역]]이 '''무기류'''(유럽) - 흑인 노예(아프리카 서안) - 설탕(신대륙 서인도 제도)이었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영국 정부는 해상 패권의 기반이 되는 대형 주력 전함의 기술을 제외하고는 무기류의 수출에 큰 제약을 걸지 않았다.] 총 뿐만이 아니라 대포의 기술 격차도 심각하게 벌어져서, 조선이 서양에서 수백년 전에 개발한 불랑기포를 여전히 애지중지하며 썼던 반면, 영국은 1850년대에 사거리, 연사력, 위력 모두에서 불랑기포를 압도하는 [[암스트롱 포]]를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이마저도 암스트롱 포의 화력이 장갑함의 장갑을 뚫기에 부족하다는 이유로 곧 퇴출시키고 일본 등의 해외 국가에 싸게 넘기며 다른 대포를 사용할 정도였다.[* 참고로 운요호에는 암스트롱 포가 탑재되어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운요호의 제원에서 나오는 대포들의 [[구경]]이 암스트롱 포의 구경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 오히려 운요호는 당시 영국 소형 전투함과 마찬가지로 연안 포격을 위한 대구경 [[박격포]]를 주력으로 사용하고, 여기에 최소한의 함대함 전투를 위한 소구경 직사포 몇문을 [[부포]]로 탑재한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당시 사거리, 연사력, 위력 모두에서 후진적인 무기를 장비한 조선군은 숫자가 많다고 해서 서양의 신식 무기를 장비한 군대를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이러한 기술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더 커져만 갔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군은 메이지 유신 전후로 내전을 겪으며 실전 경험도 제법 많이 쌓은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혹시 조선군 다수가 매복을 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가까이 접근했을때 기습하여 숫적인 우위를 이용할 수 있다면 모를까, 서로 진형을 갖추고 싸우는 형태의 전투에서는 조선군이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여기서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러한 군사 기술 격차를 고려하더라도 당시 조선군의 방비 태새가 너무 빈약했다는 점이다. 옆나라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 이전 막부에 대항하여 일어난 사쓰마, 조슈, 도사 번 등이 영국으로부터 신식 소총을 수천정씩 구입하고 증기선 등도 해외에서 도입하여 무장했는데, 비록 이들 번이 재정이 풍족한 영지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일본에 300개 가량 있던 번 중에 하나가 수천정의 신식 소총을 구입한 것이다. 반면에 조선은 정부 차원에서 강화도 일대의 무장을 강화한다고 한 것이 고작 250톤 전투함과 수십명의 수병에게 털릴 수준에 불과했다. 상술했듯이 국가 경제를 망가뜨린 흥선대원군 시절을 겪으며 조선의 경제력이 많이 약화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이 하야한 이후에도 명성왕후는 궁궐에서 거듭 굿판을 벌이느라 많은 국세를 낭비했고 민씨 외척 세력은 국세를 착복하는데 혈안이 되어 국가 재정을 더욱 나락으로 빠뜨렸다. 세금이 부족하더라도 국가의 존망이 달린 국방은 격동의 시대에서 다른 사안보다 높은 우선 순위를 가져야 하는데, 운요호 사건이 이후 조선의 멸망으로 이어진 과정을 잘 알고 있는 현대인으로서는 당시 조선의 빈약한 안보 의식에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 없다.[* 전제군주제나 독재정권의 안위는 군부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한데 고종정권은 군부 특히 중앙군 병력에게 갈 월급마저 착복하게 이른다. 이는 세도정치시기보다 퇴보된 모습으로 그 세도가 정권조차 군부를 장악하고 정권의 기반으로 활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